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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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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해피 만다라’ 작가 동휘 스님

동휘 스님은 “만다라는 ‘밝은 빛’을 그린 그림”이라며 “끊임 없이 빛을 바라보고 느끼고 먹는다면 마음속에 불이 켜져 자신도 모르게 해피 만다라가 된다”고 강조했다.

검은 베일 속에 얼굴을 가린 수녀들의 그레고리안 성가가 가르멜 수녀원을 휘감았다. 성스럽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느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사춘기 어린 소녀는 성가대 활동에 이끌렸다. 신부님들도 미사가 끝나면 바로 떠나야 했던 엄격한 규율이 존재했던 수녀원에서 그는 주일이면 부모의 손에 이끌려 미사를 드렸다. 왠지 스스로를 유폐시켰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더 큰 자유를 얻은 모습을 수녀원 수녀들에서 봤다. 하지만 왠지 애잔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존재의 비장함이었을 것이다.

미대 출신으로 20년 가까이 만다라 그림을 그리는 동휘(54)스님 이야기다. 그는 수산나라는 이름으로 유아영세를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 은경축일(신품 25주년) 땐 얼굴 스케치를 선물로 드려 용돈을 받기도 했다. 그 돈으로 학교 앞 튀김집 외상값도 갚고 친구들에게 한턱을 내기도 했다.

“성당에서 학생부장을 맡고 보컬 활동도 하며 모태신앙을 지켜오던 저는 늘상 수녀보다는 신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자로선 불가능한 일이었죠.”

결국 그는 어느 날 고해성사를 했다. 스님이 돼야겠다고.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알아본 신부님의 “수산나야 수녀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뛰쳐나왔다. 그 후로 그는 긴 머리카락이 부담스러웠다. 미장원에 자주 가 헤어스타일을 바꿔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죽 했으면 미장원 주인이 “머리스타일 바꾸는 것은 좋지만 이 담에 서방을 자주 바꾸지는 말라”고 했을 정도다.

그는 동생이 아파 산중 수양을 하면서 불교와 연을 맺게 된다. 불교계 잡지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고승들도 많이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인도 다람살라의 달라이 라마를 취재하기도 했다.

“저를 달라이 라마에게로 안내한 것은 티베트 스님인 추상 린포체였어요. 그로부터 다람살라의 어려운 형편을 듣게 됐지요. 저는 겁도 없이 구좌당 1000달러 하는 것을 100구좌 만들어 주겠다고 덜컥 약속했어요. 전국 사찰을 돌며 호소하면 쉽게 될 것으로 생각했지요.”

현실은 그에게 냉정했다. 티베트 스님에게서 계속 연락이 왔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그 쪽에서 만다라 전시와 공연을 제의해 왔다.

“서울과 제주까지 주요 사찰을 돌며 만다라 그림과 업장을 소멸한다는 ‘참 댄스’를 펼쳤어요. 전시와 공연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는 이 때 티베트 스님으로부터 만다라 그림을 선물 받는다.

“방안에 만다라 그림을 여기저기 붙여 놨어요. 그리고는 어느 순간부터 따라 그리기 시작했지요.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물과 불, 바람, 별, 꽃, 달, 해, 구름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밝아지고 행복해졌어요. ‘해피 만다라’가 됐습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6세에 머리를 깎는다. 전화로 미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출가했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어머니는 목이 멘 듯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수화기에서 “수산나야 그럼 머리 깎았냐”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럼 스님 됐으니깐 깎았지”라고 답했다. 어머니는 괜찮다 하시면서도 “미국에 오면 가발이 많단다”하시면서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으셨다.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어머니는 스님이 된 딸을 보기 위해 절을 찾으셨다. 어머니는 딸이 부처님께 인사하라하니 “부처님 안녕하세요”라며 꾸벅 절을 하고는 “하느님 아버지,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마리아여, 우리 동휘스님 큰 스님 되게 해주세요”라며 기도하셨다. 밥을 먹을 때도 딸은 합장하고 어머니는 성호를 그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도 부처님에게도 큰스님이 되게 해달라 비는 뜻은 같았다. 그래선지 그는 가톨릭을 친정처럼 여긴다.

“성경에 태초에 빛이 있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붓다는 긴 어둠 끝에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지요. 만다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빛의 통로입니다.”

수행의 근본은 마음을 밝히는 데 있다. 어두운 밤에 불을 밝히듯이 온 몸과 마음에 불을 켜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빛으로 가득 채우라는 것입니다. 뜨거운 빛은 비록 마음에 티끌이 쌓이고 얼룩이 진다해도 금방 녹여 버립니다. 태양을 상상하고 빛나는 촛불을 온몸에 켜는 이미지를 쉼없이 떠올리면 됩니다.”

그는 밝은 이미지를 연상하면서 밝은 말을 하라고 권한다. 밝은 말을 하면 마음의 내부에서 아주 ‘작은 용’이 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게 빛과 깨달음의 씨앗, 바로 ‘옴’이다. ‘옴’이 반짝거리는 것이 ‘해피 만다라’라는 얘기다. 그의 만다라 그림은 이를 형상화하고 있다.

“12간지 중에 용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 모든 사람이 용꿈을 꾸기 원하고, 성공한 사람을 일컬어 ‘용 됐다’고 하잖아요. 빛을 먹고 자라는 빛의 동물이지요. 생각, 말, 행동으로 빛을 먹으며 어떤 경계에서도 밝게 반응하는 수행이 필요하지요.”

그는 빛을 먹으라고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열리는 열쇠라고 했다.

“우리가 매일 빛 속에 살면서 전혀 빛을 의식하지 않지만 햇빛, 달빛, 별빛 등 반짝이는 모든 빛을 의식하고 마음 속으로 계속 빛의 스위치를 누르고 빛으로 샤워할 때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행하는 대로 척척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진다는 얘기지요. 빛나는 말과 생각을 던지면 그것은 용이 되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빛을 따라 밝은 쪽으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던지라고 했다. 수행이란 것도 사실은 밝은 쪽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식물이나 동물은 물론 모든 존재가 씨앗이 있는 것처럼 빛에도 씨앗이 있습니다. 빛의 씨앗은 밝은 말을 먹고 자라서 빛의 동물인 용이 됩니다. 우리는 다들 한 마리의 어린 용입니다.”

이 같은 깨달음이 오자 그는 귓전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축복의 말로 들렸다. 이마엔 뜨거운 김이 솟아났다. 티베트, 네팔, 인도 등에서 만다라 그림을 모았다. 최근에 그는 태극 만다라도 그리기 시작했다.

“불상의 모습은 물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인도네시아 브도부두르 사원의 건축구조, 태극문양마저도 해피 만다라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요즘 그가 주지로 있는 강원도 홍천 여래사 경내에 ‘해피 만다라’ 성전을 추진하고 있다. 만다라 그림이 전시되는 공간이다. 서울 인사동엔 ‘해피 만다라 문화원’을 개원했다. 만다라를 문화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해서다. 공평갤러리에선 만다라 그림전이 10월1일까지 열린다.

 

세계일보 2013-09-29